“아이들이 엄마를 언제 생각하는지 알아요?
길가다 예쁜 사람 봤다고 엄마를 떠올리진 않아요.
엄마를 ‘맛’으로 기억해요. 김치찌개 먹으면서, 된장찌개 만들면서 엄마를 떠올리죠. ‘엄마 맛이 아니야. 엄마꺼 먹고 싶어’하면서 전화가 와요.” 뜬금없이 눈물이 맺혔다. 이게 뭐 그렇게 슬픈 이야기라고. 문맥과 상관없이 터져버린 눈물에 적잖이 당황했다. 아이 학원 원장님과 상담 자리였다. ‘엄마 맛’을 기억해서 아이들이 전화한다는 말에 도리어 내가 울컥 했다. 난 김치찌개를 먹으며 엄마를 생각하지도 않는 데 말이다. 대신 나는 육개장을 먹을 때마다 엄마가 떠오른다.
엄마는 이렇게, 아무 곳에나 있다. 생각없이 길을 걷다 돌부리에 걸리듯 무방비 상태로 하루를 살아가다 이렇게 툭, 전혀 상관 없는 순간 엄마에게 걸려 눈물이 터진다. 학원 원장님과 상담을 할 때처럼 마켓에서 복숭아를 사다가, 아이의 색연필을 찾다가, 대답 없는 아이를 바라보다가, 그렇게 문득 일상에서 엄마를 생각한다.
마켓 입구에 놓인 노란 복숭아가 참 맛있어 보이던 날이었다. 이리저리 흠없는 것으로 잔뜩 골라 봉투에 담았다. 저만치 들어가니 또 다른 복숭아가 있었다. ‘흰 복숭아’라고 쓰인 글자를 본 순간 딸 아이가 아침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나는 하얀 복숭아가 맛있는 거 같아.”
손에 들린 노란 복숭아를 보며 잠시 주저했다. 노란 건 내가 먹지 뭐. 하얀 복숭아를 몇 개 더 골랐다. 아까보다 훨씬 더 꼼꼼하게, 흠없는 복숭아로 고르는 나를 보며 엄마를 생각했다.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그럴 때가 있었다. 나는 기억도 안나는 데 엄마가 가끔 “이거 지난 번에 너가 맛있다고 했잖아”라며 과일이나 음식을 내놨다. 그때마다 “몰라, 내가 그랬나?”라며 성의없게 대답하곤 했다. 엄마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그때는 몰랐다.
딸 아이가 뭔가를 찾아내라며 짜증을 부릴 때도 있다. 며칠 전엔 빨간색 색연필이 없다며 어디있냐고 물었다. 바쁜 아침시간이라 “네 물건인데 엄마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아냐”며 나도 짜증을 냈다. 아이가 학교에 가고 분주한 아침이 지나니 미안한 마음이 올라왔다. 아이 방으로 갔다. 색연필은 책상과 벽 사이 공간에 떨어져 있었다. 주워서 책상에 다시 올려 놓으며 엄마를 생각했다.
나 역시도 엄마에게 없어진 물건을 찾아내라고 생트집을 잡을 때가 있었다. 엄마가 만지지 않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막무가내로 ‘찾아내라’고 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찾아지지 않던 그 물건이 책상 위에 있었다. 엄마가 “아침에 찾던 거 책상 위에 있어”라고 하면 미안한 마음에 “봤어”라고 시큰둥하게 답했다. 엄마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사과 먹을래? 딸기 먹을래?”, “물 마실래? 우유 마실래?”, “학교는 어땠어? 별일 없었어?”
아이에게 자주 묻는다. 대답을 속시원히 안하니 여러번 묻는다. 아이의 하루는 어떤지, 어떤 마음, 무슨 생각인지, 그저 궁금하다. 냉큼 대답을 해주지 않는 아이를 볼 때마다 나는, 나의 엄마를 생각한다.
한국에 계신 엄마도 항상 여러가지를 묻는다. 그곳은 몇 시인지, 날씨는 어떤지, 무얼 먹었는지, 아픈 곳은 없는지. 뭘 그렇게 궁금해 하는지, 뭘 그렇게 알고 싶어 하는지. 같은 질문 몇 번째냐며 퉁명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그저 궁금하고, 알고 싶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었던 거구나. 이제서야 알 것도 같다.
2년 만에 한국을 간다. 엄마는 아마도 육개장을 잔뜩 끓여 놓고 나를 기다릴 것이다. 언젠가 흘렸던 말들을 기억해내서 과일이나 음식을 가득 사놓을지도 모르겠다. 얼굴을 볼 때 마다 더 먹고 싶은 것은 없는지, 더 필요한 것은 없는지, 여러번 물어볼 것 같다. 그 목소리, 그 얼굴, 벌써부터 눈 앞에 그려진다. 잘 해야지, 조금 더 살갑게 대해야지, 많이 안아 드리고, 같이 많이 웃어야지. 다짐을 해보지만 어느새 퉁명스럽게 툭, 나는 한마디하고 말 것이 뻔하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엄마를 생각한다. 일상 속에 함께 있을 엄마를 기다린다.
김동희
전 미주 한국일보, 뉴욕 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현재 미국병원 암센터에서 커뮤니티 아웃리치 담당자로 일하며, 미국에서의 일상을 소재로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다. dhkimla@gmail.com
Comment 0
일자: 2024.11.17 / 조회수: 27 “아이들이 엄마를 언제 생각하는지 알아요? 길가다 예쁜 사람 봤다고 엄마를 떠올리진 않아요. 엄마를 ‘맛’으로 기억해요. 김치찌개 먹으면서, 된장찌개 만들면서 엄마를 떠올리죠. ‘엄마 맛이 아니야. 엄마꺼 먹고 싶어’하면서 전화가 와요.&rdquo... |
일자: 2024.10.16 / 조회수: 58 좋아했던 사람이 있다. 인생의 한 시기, 그녀들과 함께여서 참 따뜻했다.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어느 식사 자리였다. 밝고 쾌활한 그녀는 그날 모인 많은 이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얼마나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는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면 모든 상황이 눈 앞에 생생하게 ... |
일자: 2024.09.22 / 조회수: 40 얼마전 회사 동료가 결혼을 했다. 샌디에고 바닷가에서 결혼식을 올린 그녀가 휴가에서 돌아오자 동료들은 그녀의 결혼식 이야기 듣기로 바빴다. 결혼식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과 피로연의 즐거운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다가 웨딩 케이크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 |
일자: 2024.08.09 / 조회수: 112 딸 아이의 이름은 그레이스(Grace)다. 하지만 종종 그레이스 에스(Grace S.)로도 불린다. 미국에서는 퍼스트 네임이 같을 경우 라스트 네임의 첫 대문자를 붙인다는 것을 다른 그레이스들을 만나면서 알게 됐다. 한글 이름 중 동명이인을 김영희 A와 B로 구분하는 것의 미국 방식... |
일자: 2024.07.14 / 조회수: 49 유난히도 바빴던 상반기를 끝내고, 7월 첫 주 휴가다. 세상의 모든 분주한 것들과 이별하고 나만의 시간, 맛있는 커피 한 잔이 간절하다. 오랜만에 여유 있는 아침이니 핸드 드립(Hand-Drip)으로 마셔야겠다. 핸드 드립은 커피를 만드는 방법 중 한 가지로 푸어 오버(Pour Over)라... |
일자: 2024.06.29 / 조회수: 43 불현듯 내가 밥만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남편도 내 앞에서 아무 말 없이 밥만 먹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얼굴이 화끈거렸다. 옆 자리부터 둘러봤다. 그곳에 앉은 젊은 여성들이 우리 이야기를 할 것만 같았다. “저 아줌마랑 아저씨는 별로 사랑하지 않나 봐... |
일자: 2024.04.14 / 조회수: 182 어느 화창한 일요일, 동네를 걷다 보니 아이들이 담요를 깔고 장난감을 팔고 있었다. 아이들은 나무에 ‘가라지 세일(Garage Sale)’이라고 써서 크게 붙여놨다. 풍선으로 예쁘게 장식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지나가다 발길을 멈췄다. 누구는 “너희들 정말 멋진 ... |
일자: 2024.03.22 / 조회수: 56 커뮤니티 아웃리치 담당자로 일하다 보면 다양한 상황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현재는 암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인들이 암 정기검진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다. 암은 조기에 발견하면 치료가 쉽고, 생존율도 높일 수 있는 대표적인 질병... |
일자: 2024.02.16 / 조회수: 61 딸아이가 친구를 만났을 때다. 아이 친구 엄마와 같이 앉아 있는데 딸국질을 하는게 보였다. 혼잣말처럼 “뭐 맛있는 걸 혼자 먹었나, 딸국질을 하네”라고 하는 찰나 아이의 친구 엄마는 웃으며 영어로 “딸국질을 하는 걸 보니 키가 크려나 보다”고 했다. ... |
일자: 2023.12.14 / 조회수: 119 시더스-사이나이 암센터 COE팀과 이웃케어클리닉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양주동 간 전문의가 간암과 임상시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시더스-사이나이 병원 간암센터 양주동 디렉터 B형 간염, 간암 위험율 높여 음주·비만 ×, 건강식·운동 ○ 임상시험으로 최신 ... |
일자: 2023.11.17 / 조회수: 65 이 계절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닥터 리’, 10여 년 전 썼던 기사의 주인공이다.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유는 그와의 인터뷰가 정신없이 달리던 내 삶을 멈춰 세웠기 때문이다. 냉기가 느껴지던 작은 방에서 그와 처음 마주했다. 치과의사였던 그를 만난 곳... |
일자: 2023.10.23 / 조회수: 59 한 달에 한두 번은 걸려 오는 전화가 있다. 가슴에 멍울이 있는데 유방암 검사를 어디서 받을 수 있냐는 질문부터 유방암 진단을 받았는데 건강보험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연에 이르기까지 유방암 관련 문의들이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상대방의 나이를 알게 되... |
일자: 2023.09.19 / 조회수: 62 일 주일에 한 번, 팀미팅을 한다. 팀원들이 모두 모여서 한 주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 앞으로 계획된 행사들을 논의하는 시간이다. 이 때마다 가장 처음엔 하는 일이 체크 인(Check-in)이다.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데, 서로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공유한다. 이 때 가장 ... |
일자: 2023.08.17 / 조회수: 63 여기저기 얼마나 전화를 해댔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연결이 되어도 이 사람이 하는 말, 저 사람이 하는 말이 달라서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언제인가 봤던 영화에서 산길을 잃은 주인공이 밤새 길을 헤메었지만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 |
일자: 2023.07.15 / 조회수: 90 어느새 5년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20대 후반에 미국에 왔다. 미국병원에서 일하게 됐다고 했을 때 내 영어 실력을 아는 지인들은 “보스랑은 어떻게 의사소통 할거야?”라고 물었다. 나 역시도 영어가 걱정이었다. 지금이야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날마다 &lsquo... |
일자: 2023.06.09 / 조회수: 75 사진 출처: Designmatters at ArtCenter College of Design ‘자카란다’ 피는 계절이 되면 건강검진을 생각한다. 아주 사소한 대화가 자카란다라는 ‘꽃’과 건강검진이라는 ‘행동’을 연결시켰다. 5년전 이맘때다. 회사 동료들과 길을 걷고 있었... |
일자: 2023.05.17 / 조회수: 96 “엄마, 나 이 빠졌어. 흔들려서 혀로 밀다보니 이렇게 툭 빠졌어.”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손바닥을 펴서 어금니를 보여줬다. 한참 어릴 때만해도 이를 빼려면 울고 불고 난리가 났는데, 이제는 학교에서 이를 뺐다며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는 나이가 됐다. 아... |
일자: 2023.04.14 / 조회수: 87 최근 기분 전환을 위해 새봄맞이 책장정리를 했다. 어지럽게 꽂혀 있는 책들을 꺼내 주제별로 정리하고 키를 맞춰 책꽂이에 넣다 보니 우울한 시절, 낙담이 가득하던 때에 좋은 친구가 되어준 두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따귀 맞은 영혼’, 그리고 ‘너는 나에... |
일자: 2023.03.12 / 조회수: 87 3월은 대장암 인식의 달(Colorectal Cancer Awareness Month)이다. 유방암 인식의 달을 기념하는 10월 곳곳에서 분홍색 리본을 만날 수 있다면 3월에는 파란 리본이다. 대장암연합(Colorectal Cancer Alliance) 등의관련 단체들은 3월 한 달 동안 파란 리본을 내걸고 대대적인 인... |
일자: 2023.02.12 / 조회수: 427 암 예방 교육을 할 때마다 참석자들에게 묻는 질문이 있다. “암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다시 말해 “암은 왜 걸릴까요?”가 질문이다. 나오는 대답은 거의 비슷하다. 참석자들은 술, 담배, 비만, 운동 부족 등을 답으로 말한다. 이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