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희의 세상보기>
무릎 굽히고 눈높이 맞춰
‘작은 어른’으로 대해주셨던
의사 선생님 모습에 놀라
얼마 전 아홉 살 딸과 병원에 다녀왔다. 병원에 갈 때마다 딸 아이는 묻는다. “엄마, 에릭 선생님 병원에 가는 거예요? 나는 그 병원이 제일 좋아요.”
아이가 말하는 ‘에릭 선생님 병원’은 한인타운에 있는 ‘이웃케어클리닉’이다. 에릭 선생님은 그곳에서 딸을 진료해주시던 주치의였다. 지금은 건강보험이 바뀌어서 다른 병원에 가지만 아이는 아직도 ‘병원’이라고 하면 ‘에릭 선생님’을 떠올린다. 아이를 ‘어린아이’가 아닌 ‘작은 어른’으로 대해주셨던 의사 선생님이시다.
그날 아이는 눈이 빨갛게 충혈돼서 간지러워했다. 에릭 선생님께서는 “안녕, 그레이스. 오랜만이구나”라고 반갑게 인사를 하며 진료실로 들어오셨다. 내가 막 아이의 상태를 설명하려고 하는데, 선생님의 눈은 내가 아닌 아이를 보고 계셨다. 그리고는 내가 아닌 아이와 대화를 시작하셨다. 아이가 앉아 있던 의자 앞으로 가서 무릎을 굽히고는 눈높이를 맞췄다. “잘 지냈니?”라고 안부를 묻자 아이가 “네 좋아요(I am fine).”라고 답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나가는 척을 했다. 그러면서 “어? 그래? 그럼 오늘 나는 너를 볼 필요가 없겠네?”라고 말했다.
아이는 처음엔 어리둥절하더니 이내 “나 눈이 아파요. 빨갛게 됐어요”라고 아픈 곳을 설명했다. 에릭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 앞으로 다시 다가와 “그럼 한 번 볼까?”하고 진료를 시작하셨다. 아이가 자신의 아픈 상태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아이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물어봐 준 의사 선생님의 모습에도 놀랐다. 이때 아이는 만 5세였다.
이후에도 에릭 선생님은 아이를 어른 환자와 똑같이 대하셨다. 오히려 더 예의를 갖추는 것처럼 보였다. 무엇을 할 것인지 설명해주고, 허락을 구하고, 질문했다. 처음에 아이는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진료를 위해서는 진료용 침대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그때도 아이에게 물었다. “여기 침대 위에 앉을 거야. 내가 너를 위로 올려서 앉혀줘도 될까?”청진기를 아이 몸에 댈 때도 살짝 입김을 불어 청진기의 차가운 부분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이날 나는 몇 마디 하지 않았다. 아이가 환자이니 당연했지만, 나에게 아이는 겨우 다섯 살의 ‘어린아이’였다. 아이가 직접 아픈 곳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의사 선생님은 달랐다. 아이에게 물었고, 아이와 눈을 맞췄다. 몸에 손이 닿을 때는 양해를 구했다. 아이를 ‘어른’처럼 대했다. 이날의 경험은 오랫동안 나에게 남았다. 나도 이날 이후로는 아이를 조금씩 ‘어른’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믿어주니 아이도 달라졌다. 엄마 생각보다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았고, 엄마 도움 없이 스스로 해내는 것도 늘었다. 그렇게 아이는 점점 ‘작은 어른’으로 크고 있다.
아직도 가끔 이날을 생각한다. 병원에서 돌아온 아이는 자기가 선생님께 어디가 아픈지 설명했다며 매우 뿌듯해했다. 선생님이 약을 잘 챙겨 먹으라고 했다면서 약 먹을 시간이 언제인지 몇 번씩이나 물었다. 약 먹으라고 잔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자기 약을 스스로 챙겨 먹고는 꽤나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이었다. 아파서 간 병원에서 아이는 자신감을 얻어 왔다. 일상의 값진 경험 덕분에 우리는 한 뼘 자랐다. 아이도, 엄마도, 말이다.
이웃케어클리닉 닥터 에릭 선생님과 그레이스 송 어린이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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