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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2025.01.15 / 조회수: 16

상대를 읽기가 어려울 땐

내가 대학을 다니며 한창 연애에 열을 올릴 때, 어머니는 나의 데이트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기셨다. 아마도 대리만족이 아니었던가 싶다. 성악을 하신 어머니의 목소리는 젊어서, 전화를 걸어온 남학생이 나 인줄로 착각하여 어머니께 약속을 청하였던 일화도 있었다. 어머니는 ...

일자: 2024.12.01 / 조회수: 39

이달의 수필

숫자의 시대 집에 들어가려면 현관문에 비밀번호 5자리를 입력해야 열린다. 수영하러 피트니스 센터에 입장할 땐 프런트에서 암호나 손가락 지문으로 나를 증명해야 한다. 탈의실의 락커 키도 3자리 비밀 번호를 조합해야 열린다. 아이폰엔 4자리 숫자를 입력해야 활성화된다. 컴...

일자: 2024.10.17 / 조회수: 44

이달의 수필

이름에 담긴 뜻처럼 산다면 야구연습장의 기계가 고장이 나서 수리공을 불렀다. 부속을 갈아야한다며 명함을 주는데 이름이 Steve Fullylove 이다.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인디언처럼 이름에 고운 뜻을 가지고 있다. ‘날 때부터 용감한 이’ &lsquo...

일자: 2024.09.22 / 조회수: 53

이달의 수필

말의 총량, 입의 십계명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 했지만 나는 시아버지의 사랑을 받아본 기억이 별로 없다. 육사 출신의 군인 시아버지는 늘 내게 작전 지시하듯 주의 사항을 전달하시곤 했다. 시아버지는 시정명령을 적어서 품에 간직하고 있다가 나를 만나면 그걸 꺼내어 읽으...

일자: 2024.07.28 / 조회수: 49

이달의 수필

여름손님 남들은 한국을 탈출하여 휴가를 떠나는데, 나는 한증막을 찾아온 셈이 되었다. 인천공항에 당도해 밖으로 나서는데 안경에 부옇게 김이 서린다. 마치 찜질방에 들어서듯이. 사상 최고로 더운 여름이라며 연일 기록행진을 하는 한국의 여름이다. 전력난으로 블랙아웃이 될...

일자: 2024.06.29 / 조회수: 46

외상장부

동네 구멍가게인 평화 슈퍼에는 외상장부가 있었다. 가게 주인아주머니가 연필에 침을 묻혀가며 쓰던 손바닥만 한 공책 말이다. 겉표지엔 ‘신문사 집’이라고 적혀있고, 한 달에 한번 아버지 월급날에 외상값을 정리하곤 했다. 다른 집은 그 당시의 흔한 반찬거리인 두...

일자: 2024.05.28 / 조회수: 58

2인자를 위하여

남편이 속한 Glory Gospel Mission 재즈밴드가 정기공연을 성황리에 마친 후, 지난 주말 앵콜 공연을 했다. 거실 한 쪽 남편의 트럼펫 코너에서 하는 연습을 매일 들었기에, 레파토리 전체를, 특히 남편의 연주 부분은 외우다시피한다. 그런데도 앵콜 공연에 또 따라갔다. 서로 안...

일자: 2024.03.13 / 조회수: 44

빈방에 누워

지난번 큰 비로 방 하나가 못쓰게 되었다. 마루판이 튕겨 올라와서 신발을 신고 들어가 책을 꺼내와야 했다. 공부방으로 쓰던 방이었다. 급하지 않다며 차일피일 미루는 것을 신경질을 부렸더니만 그제서야 고치기 시작했다. 돈이 안 나오는 공사라며 자기 집은 잘 안 고친다. 다...

일자: 2023.11.14 / 조회수: 33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단골 옷가게의 사장인 S 씨가 결혼을 한다. 그녀의 신랑감과 밥을 함께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대화가 궁했다. 잘 모르는 사이에 공통화제도 없으니 어색했다. 한국사람들이 흔히 하는 고향과 족보에 대해 몇 마디 말을 하다가, 뜻밖의 연결고리를 발견했다. 신랑의 누이가 내가 ...

일자: 2023.10.23 / 조회수: 36

부러운 이모작

운동을 마치고 친구와 점심을 먹고 있는데 안면이 있는 J 여사가 식당으로 들어온다. 식사 약속이 있어 오는 줄 알고 인사했더니 일하러 왔단다. 자연스럽게 앞치마를 두르고 콩나물을 다듬기 시작한다. 식탁 정리하고 식재료 손질하는 일을 하루에 4시간씩 하고 있단다. 신선했다...

일자: 2023.09.12 / 조회수: 38

밥의 향기

어렸을 때, 우리 집에는 대청마루 한 복판에 연탄난로가 있었다. 겨울의 기억일 것이다. 신문사에 다니시는 아버지는 글쓰는 것이 직업인지, 술 마시기가 직업인지 모르게 늘 술이 취해 늦게 오셨다. 이른 저녁을 먹고 우리가 잠이 들 무렵이면 어머니는 아버지를 위해 따로 밥을 ...

일자: 2023.07.19 / 조회수: 60

멍멍 개소리

개무시, 개망신, 개수작 등등의 단어는 개를 하위에 두고 만들어낸 조어이다. ‘개’라는 접두어 때문에 더 상태가 악화되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매우’ 대신 ‘개’를 쓰면 훨씬 의미가 강조되어 그 뜻이 더 개떡이 되곤 한다. 그럼에도 사람...

일자: 2023.05.21 / 조회수: 50

5월 추천 詩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이상국(1946~)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 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

일자: 2023.04.11 / 조회수: 136

4월 추천 詩

그 대 앞에 봄이 있다 김종해 (1941~)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우리 사랑하는 일 또한 그 같아서 파도치는 날 바람 부는 날은 높은 파도를 타지 않고 낮...

일자: 2023.04.09 / 조회수: 926

접인춘풍(接人春風) 임기추상(臨己秋霜)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와 동물들과 벌레들이 놀라서 깨어난다는 경칩도 지나고, 미국에서는 First day of spring 이라는 춘분도 지났다. 아직 쌀쌀하다. 뒷마당의 매화는 피었다 지고 어제 내려가 보니 자두꽃과 복숭아꽃 살구꽃이 활짝 피었다. 봄이 오기는 오나 보다. 그러나 요 ...

일자: 2023.03.12 / 조회수: 41

떠나야 보이는 것들

아침저녁으로 혈압약, 면역억제제, 스테로이드에 각종 비타민 등 한 움큼씩 약을 입에 털어 넣으며 식성이 좋아 그나마 다행이라고 스스로 위로한다. 장기 이식 환자는 평생 먹어야 하는 약들이므로 내 식욕에 감사한다. 뭐든 잘 먹으니 약 먹는 건 일도 아니지 뭔가. 한 달에 적...

일자: 2023.02.17 / 조회수: 30

사람과 사람 사이

아침 출근길 101번 할리우드(Hollywood) 프리웨이에서 110번 하버(Harbor) 프리웨이로 갈아타야 하는 길은 늘 어렵다. 모이고 갈라지는 8차선의 큰 도로여서 맨 오른쪽으로 진입한 나는 차선을 대여섯 번 빠르게 바꾸어야 왼쪽 편 110번의 가장자리라도 걸칠 수 있다. 나처럼 겁이...

일자: 2023.02.12 / 조회수: 40

2월 추천 詩

아내와 나 사이 이생진 (1929~) 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 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

일자: 2023.01.11 / 조회수: 74

오늘의 운세

가끔 신문에 나오는 오늘의 운세를 본다.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오늘의 운세를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오늘의 운세만큼 장수하는 연재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읽는 이가 많다는 소리일 터. 크리스천인 나는 오늘의 운세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안 읽지는 ...

일자: 2022.11.12 / 조회수: 68

11월 추천 詩

오래된 기도 이문재(1959~)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이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