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남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병원 예약하기, 너무 힘들어. 빨리 예약할 수 있는 안과 찾아서 현금 내고 진료받을래.”
등잔 밑이 어두웠다. 병원에서 일하는 아내는 커뮤니티에서 암 예방 건강교육을 하고, 암 정기검진을 받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 미국 의료 시스템이 한국에 비해 복잡하다보니 그사이 어디선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이들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 알려주는 ‘헬스 내비게이터’ 역할도 한다. 그런데 정작 바로 옆에 있는 남편이 복잡한 의료 시스템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남편 이야기는 이렇다. 최근 들어 눈이 좀 불편했다고 한다.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다. 눈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것 같아서 안과에 가려고 하니 건강보험이 HMO (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였다. 주치의를 먼저 만나야 했다. 주치의 예약도 한국처럼 하루 이틀 만에 잡히진 않았다. 몇 주를 기다려 주치의를 만나 안과로 리퍼럴을 받았다. 안과 예약을 하려고 병원에 전화했더니 6주 뒤로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쯤 되면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불편하던 눈도 더 아픈 것처럼 느껴진다. ‘한국처럼’ 빨리 전문의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건강보험이 있지만 셀프 페이(Self-pay)로 검사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남편의 푸념을 듣고 있던 나는 그의 ‘아내’에서 ‘헬스 내비게이터’로 역활을 바꿨다.
“아 그러시군요, 선생님. 주치의에게 그만큼 아프다고 이야기하셨나요?”
“아니 뭐… 그냥 안과 가고 싶다고…”
“네, 그럼 혹시 안과 예약이 6주 뒤에 잡혔는데 그때까지 기다리기엔 증상이 좀 심하다고는 이야기해 보셨나요?”
“….”
“주치의 오피스로 연락하셔서 현재 어떤 상황인지 말씀하시고, 의논하시면 어떠실까요? 주치의는 선생님의 건강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돌봐주시는 분입니다.”
남편 얼굴엔 ‘귀찮다’라는 표정이 스쳤다. 하지만 코로나 덕분에 ‘텔레 헬스’의 세상이 펼쳐졌고, 온라인을 통해 간단히 주치의에게 문자를 보내는 일도 가능해졌다. 남편은 주치의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주치의도 남편의 증상을 알고 있으니 예약이 너무 늦게 잡힌다며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남편은 2주 뒤 안과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처음 남편이 제안했던 ‘셀프-페이’도 하나의 해결 방법이 될 수 있다. 건강보험으로 진료를 받는 대신 셀프 페이를 선택했다면 남편은 2주보다 더 일찍 의사를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주치의에게 한 번 더 이야기해보길 권유했던 이유는 1) 남편의 증상이 심하지 않았고 2) 진료 이후 치료가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서였다. 첫 진료는 셀프-페이로 받았다 해도 만약 남편에게서 질병이 발견되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 그 모두를 셀프-페이로 할 순 없으니, 처음부터 건강보험 안에서 진료를 받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도 한몫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이 이번 경험을 통해 미국 건강보험 제도와 병원 시스템에 보다 친근해지길 바랐다. 그렇게 몇 번 헤메고, 해결하고를 반복하던 남편은 이제 “별로 어렵지 않네”라며 건강보험 혜택을 잘 누리고 있다.
헬스 네비게이터로 활동하다 보면 건강보험을 카드로만 가지고 계신 분들을 자주 본다. 건강보험이 있지만 주치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병원에도 한 번도 안 가본 경우다. ‘어렵다’ ‘복잡하다’는 선입견 때문에 건강보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다. 대부분의 건강보험은 1년에 한 번은 정기검진 혜택을 제공한다. 아픈 곳 없이, 정기검진만을 위해 병원을 찾았다면 대부분 코페이먼트(Copayment)도 적용받지 않는다. 이런 정기검진 기록이 쌓이면 몸에 작은 변화가 생겼을 때도 쉽게 알아낼 수 있고 특정 질병의 조기 발견도 가능하다.
건강보험이 있다면 부디 그 보험을 잘 활용하여 건강을 지키는 방법에 보다 관심을 가지기 바란다. 미국 의료 시스템과 건강보험 제도가 한국과 달라서 처음엔 복잡하고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주변을 돌아보면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이 많이 있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알아보고, 배워서 내 건강은 내가 지키는 한인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그렇게 2023년에는 한인사회가 조금 더 건강해지길 바란다.
김동희
현재 미국병원 암센터 커뮤니티 아웃리치팀 수석 코디네이터로 활동 중. 전 미주 한국일보, 뉴욕 중앙일보 기자.‘미국 엄마의 힘’저자.
▶연락처: (213)545-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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