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
여러 해 전, 이맘때쯤 해질녘이었다. 북가주에 있는 대학원 입시생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언젠가부터 차 안으로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한 향이 유난하게 강하게 느껴진 순간, 그 향기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차를 갓길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나는 사방이 온통 오렌지가 가득한 밭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두 팔을 벌리고 눈을 감은 채 그 향기를 깊은 숨으로 들이 마시고 있었다. 프리웨이 갓길에서 그 향기에 취해 황홀 해 하는 동안,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소리는 내 마음속 기억의 어떤 노래 소리로 바뀌어서 들려졌다.
그 순간, 얼른 차에 오른 나는 기억 속의 노래 소리인 그 합창곡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를 틀고서 다시 집으로 향했다.
교회 종소리로 시작되는 이 합창곡은 내가 중학생 때 처음 들은 곡이었다. 당시 클래식 음악에 심취한 대학생이던 오빠가 구해온 LP로 접했는데, 커버에 봄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작곡가의 얼굴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이 곡은 이탈리아 작곡가 Pietro Mascagni의 오페라 Cavalleria Rusticana (시골 기사)의 오프닝 합창으로, 자연의 아름다움과 일상의 감사, 그리고 연인들의 감정을 담아 남녀가 교차해 노래하다가 혼성 합창으로 이어지는 매우 아름다운 선율을 지니고 있다.
그 때 처음 들은 그 아름다운 합창소리는, 사춘기였던 나에게 이탈리아의 자연과 정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품게 했다.
이 오페라는 부활절 아침 반나절 동안, 귀족이 아닌 평범한 마을 사람들 속에서 벌어지는 치정 사건을 다룬 약 1시간 길이의 짧은 작품으로, Verismo (사실주의) 오페라의 대표작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작품은 성당 안과 밖이라는 이중적 배경이다. 성당 안에서는 미사를 드리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고, 성당 밖에서는 사랑의 배신에 얽힌 인물들이 점점 고조되는 갈등 가운데 파국으로 치닫는다.
주인공 뚜리두는 군대에 간 사이 옛 연인 롤라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상처를 입고, 순진한 마을 처녀 산뚜짜와 약혼하여 마음의 안정을 찾아간다. 그러나 유부녀인 롤라가 질투와 집착에 사로잡혀 다시 뚜리두 앞에 나타나 그를 유혹하자 채 마음이 굳어지지 않은 뚜리두는 약혼녀인 산뚜짜를 뒤로 한 채 유부녀 롤라와 불륜의 밀회를 시작하게 된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산뚜짜는 부활절 아침에, ‘돌아와 달라’며 뚜리두에게 애원한다. 그러나 그때 곱게 차려 입은 롤라가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나타나자, 뚜리두가 그녀를 따라 성당 쪽으로 돌아서 버리자, 절망에 싸인 산뚜짜는 뚜리두의 등 뒤에 대고 외친다:
‘이 배신자! 부활절에 저주나 받아라!’, 라고.
바로 그때, 자기 부인이 가장 정숙하다고 믿고서 출장에서 막 돌아온 롤라의 남편 알피오와 마주친 산뚜짜는, 롤라가 자신과 뚜리두 사이를 시기하여 뚜리두를 자기에게서 빼앗아 갔으며, 그들은 지금 함께 성당에 있다며 그동안의 모든 일들을 털어놓자, 결국 알피오의 복수심에 불이 붙는다.
부활절 미사 후, 결투를 벌인 두 남자들! 결국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복수심에 가득찬 알피오의 날카로운 칼에 찔려 뚜리두가 죽음을 맞게 되는 그 극적인 순간에, 이 오페라의 막이 내려간다.
결국 산뚜짜가 내뱉은 저주는 뚜리두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싼투짜의 그 저주는, 뚜리두를 잃은 현실 그 자체가 저주가 되어 그녀 자신에게로 되돌아왔다.
이와 같이 시기와 질투, 미움과 배신으로 얼룩진 이 네 사람의 이야기는, 오렌지 꽃이 상징하는 의미와는 정반대로 흘러간다.
오렌지 꽃은 사랑과 순결, 결혼의 기쁨, 곧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기에 사람들은 기쁜 날에 화관이나 꽃목걸이를 만들어 서로에게 씌워주며 그 향기를 나눈다. 그러나 이 작품 속에서 그 향기는 끝내 완성되지 못한다. 사랑에 향기는 있었지만 신뢰가 지켜지지 못했고, 사랑의 향기는 시작되었으나 그 관계는 이어지지를 못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는 ‘부활절’이라는 시간 위에서 펼쳐진다.
성당 안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의 화해와 회복을 기념하고 있는데, 성당 밖에서는 불화 속의 인간들이 극단적인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부활의 의미가 파국으로 끌려가는 그 사람들을 대비하여 조명하는 가운데, 무너진 관계도 다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희망으로 다가온다.
“오렌지 향기는 바람에 날리고…”로 시작된 합창의 아름다움에 대한 나의 기억은, 결국 이 오페라 작품 전체의 관심으로 이어져서, 여러 차례 이 오페라의 공연을 보았고 다양한 영상을 접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Franco Zeffirelli가 연출하고, Georges Prêtre가 지휘하고, Plácido Domingo와 Elena Obraztsova가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상이다.
이 영상은 세계 최정상의 무대감독을 필두로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한 호흡으로 숨을 쉬는 듯한 무대로, 시칠리아 마을의 일상과 종교적 정서, 주인공들의 감정 등이 음악과 정교하게 맞물려 흐르며,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몰입하게 만든다.
그날 갓길에 서서 내가 맡았던 찐한 오렌지 향기처럼, 이 오페라의 극을 이어가는 각 장면 장면의 음악 또한 여전히 그 향기의 기억으로 내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김 양희 음악박사
Director of Los Angeles Opera Association
클래식 음악 및 오페라 분야 해설 강사
한국, 미국, 이태리, 중국 등에서 오페라 “나비부인” 등 다수 작품의 주역으로 활약하며, 수차례 독창회 개최
연세대학교와 단국대학교 및 연변대학교 등에서 특강 및 마스터클래스 진행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음악박사 졸업
Conservatorio di Musica “Giovanni Battista Martini” di Bologna 수학, Italy
Universität Mozarteum Sommerakademie, Salzburg, Austria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음악석사 졸업
연세대학교 음악학사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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