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를 닮은 팝의 황제, 그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

참 떠들썩하다! 몇십 년 전이나 오늘이나!
바로 마이클 잭슨의 전기를 다룬 영화 “마이클(Michael)”을 보고 나왔다.
나의 어린 시절 최애 인형처럼 생긴 세기의 미녀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1989년 '소울 트레인 뮤직 어워드(Soul Train Music Award)' 시상식에서 마이클 잭슨을 “진정한 팝, 록, 소울의 황제”라고 소개하는 방송을 본 적이 있다. 그땐 팝 음악의 위력이 내 마음에 온전히 와닿지 않았다. 그가 노래하는 가사는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와 그런 자신을 위로하는 이야기였는데, 이민 초기의 내게는 그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청량한 목소리와 리듬이 먼저 내 귀를 사로잡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노래 속에 담긴 이야기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감정을 몸 전체로 표현하는 춤! 마치 몸속 206개의 뼈마디가 저마다 다른 비트를 품고 있는 듯이 움직이는 그의 춤을 처음 제대로 보았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순간부터 내 귀와 눈은 '마이클 잭슨'이라는 이름에 열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무대 연주자인 나 자신이 그의 무대를 보고 입이 떡 벌어지게 된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다. 연주를 하면서 직접 지휘를 하거나, 솔로 파트를 노래하며 지휘하는 유명 연주자들은 여럿 보았지만 마이클 잭슨은 거기에서도 더 나아가 있었다. 그는 공연 도중 뮤지션이나 댄서뿐만 아니라 모든 스태프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전부 관여하며 무대를 이끌었다. 그런 압도적인 장악력을 가진 연주자가 또 있을까 싶었다.
영화 속 마이클 잭슨은 더 나은 공연을 위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움직였다. '잭슨 파이브' 시절에는 형들을 설득했고, 솔로로 전향한 뒤에는 밴드와 스태프들에게 자신이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무대를 끝까지 구현해 내도록 요구했다. 그는 단순히 노래를 부르는 가수를 넘어, 이미 완성된 공연을 먼저 보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연출가'였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뜻밖의 인물이 함께 떠올랐다.
바로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이다!
마이클에서 바그너를 보다
내가 놀란 것은 마이클에게서 바그너의 모습이 고스란히 겹쳐졌다는 점이다. 두 사람 모두 강렬한 창조력과 집중력으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했고, 음악과 무대, 이야기와 시각적 표현을 하나로 엮어 새로운 예술의 시대를 연 '종합예술의 개척자'들이었다.
19세기 독일의 오페라를 '뮤직 드라마(음악극)'라는 영역으로 확장한 바그너는 단순히 악보만 쓰는 오페라 작곡가가 아니었다. 그는 직접 대본을 쓰고 무대를 구상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작품을 공연할 전용 극장(바이로이트 축제극장)까지 지어 직접 지휘했다. 음악을 넘어 '뮤직 드라마'라는 새로운 세계를 펼쳐 놓은 그의 존재로 인해, 세계 오페라의 역사는 '바그너 이전과 이후'로 나뉘게 되었다.
마이클 잭슨 역시 다르지 않았다. 영화 속 그는 새로운 리듬이 떠오르면 입으로 먼저 소리를 내고 손끝으로 박자를 그리며 자신이 보고 있는 무대를 스태프들에게 설명했다. 카메라의 움직임과 조명의 방향, 춤이 터져 나올 타이밍까지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하나의 완벽한 공연이 완성되어 있었다. 남들이 아직 듣지 못한 음악을 먼저 듣고, 아직 보지 못한 공연을 먼저 보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대는 단순한 콘서트가 아니라 수만 명의 관객이 같은 리듬으로 숨 쉬고 열광하는 거대한 축제이자 소통의 공간이었다.
요즘 LA 다운타운을 지나다 보면 펜타닐 중독의 부작용으로 몸을 구부린 채 좀비처럼 서 있는 홈리스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안타깝고도 섬뜩한 현실이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그 풍경을 보노라면 문득 '스릴러'의 좀비 군무가 현실로 걸어 나온 듯한 착각마저 든다. 오래전에 이미 이 잔인한 현실을 예견했던 것일까?
1980년대 갱단 폭력으로 사회적 불안과 도시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어지던 시절, 그는 좀비 군무를 통해 대중문화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만들어 냈다. 지금 다시 보면 Thriller(스릴러)는 단순한 뮤직비디오가 아니라 음악과 이야기, 영상을 결합한 하나의 현대적 음악극이었다. 그것은 시대의 불안과 인간 내면의 어두움을 대중예술로 승화시킨 새로운 무대였다.
그 순간 영화 속 마이클은 내게 더 이상 팝스타가 아니라, 100년의 시간을 건너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 바그너처럼 보였다. 무대를 넘어 그들만의 완벽한 세계를 창조하려 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바그너가 오페라 무대 위에서 상류층을 위한 종합예술을 제시했다면, 마이클 잭슨은 MTV 시대에 그 꿈을 대중음악으로 실현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 묘한 인연이다. 클래식 음악만을 정답으로 알고 치열하게 공부하던 학창 시절, 바그너의 오페라 세계를 다루는 특강을 듣고 난 뒤 친구들과 모이면 MTV를 틀어놓곤 했다. 그리고 발레리나처럼 정확하면서도 무중력 상태처럼 유연한 마이클 잭슨의 퍼포먼스에 넋을 잃는 외도를 하곤 했다. 그때는 몰랐다. 훗날 두 거장이 영화 “마이클”을 통해 나의 이 글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마이클 잭슨 이전의 MTV는 사실상 백인 음악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빌리 진(Billie Jean)'과 '비트 잇(Beat It)'이 방영되면서 그의 노래는 인종의 장벽을 넘었고, 그의 춤은 세대의 벽을 허물었다. 특히 문워크(Moonwalk)는 단순한 안무가 아니라 한 시대의 거대한 문화 현상이었다.
친구가 눈앞에서 문워크의 그 신비로운 뒷걸음질을 보여주었을 때, 나 역시 넋을 놓고 바라보며 흉내 내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앞으로 걷는 것은 쉬워도 중력 없이 뒤로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다. 하지만 어디 나만 그랬으랴. 전 세계의 수많은 청소년이 그의 춤을 따라 했고,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놀이가 되었다.
그때는 그저 멋있어서 따라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니 그 경험은 내게 중요한 깨달음을 주었다. 위대한 예술가는 단지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몸짓까지 바꾸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세계는 그의 춤을 따라 했고, 그가 만든 무대의 문법을 배웠으며, 그가 보여준 모습을 새로운 스타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 영향은 한국 대중음악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80년대 박남정의 춤에 열광하던 시절에도, 박진영과 비의 무대에 감탄하던 순간에도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마이클 잭슨의 그림자 안에 있었다. 미국의 청소년들이 문워크를 따라 했다면, 한국의 청소년들은 박남정의 'ㄱㄴ춤'을 따라 했다. 그리고 오늘날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BTS 역시 춤과 노래, 메시지와 퍼포먼스를 결합한 무대 위에서 마이클이 열어놓은 길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확장해 가고 있다. 래퍼 더 게임(The Game)이 "우리 모두가 마이클 잭슨이다(We are all Michael Jackson)"라고 말했듯, 그의 무대 언어는 이미 인류의 문화 속에 깊이 이식되어 있다.
영화를 본 다음 날 아침이었다!
출근 준비로 분주한 시간, 나는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중 '사랑의 이중창'을 흥얼거리며 계란을 삶고 요거트를 그릇에 담고 있었다. 그런데 정갈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남편이 뜬금없이 내게 흰 양말 한 켤레를 쓱 내미는 게 아닌가.
“이거 신고 갈까?”
혹시 문워크라도 출 생각인가 싶어, 나도 질세라 머리 위의 페도라 모자를 잡아 옆으로 휙 던지는 시늉을 했다. 이어 다리를 양옆으로 뻗고 골반을 한 번 튕긴 뒤 정지! 그리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아뿔싸, 한 바퀴 돌았더니 세상이 잠시 핑 돌았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이 웃음을 터뜨렸고, 나도 따라 빵 터졌다.
한 예술가가 세상을 떠난 지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느 평범한 아침 부엌에서 흰 양말 한 켤레로 우리를 춤추게 만들고 있으니 참 신기한 일이다. 몇십 년이 지나도 누군가를 춤추게 하고, 노래하게 하고, 웃게 만드는 힘.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팝의 황제’라는 화려한 칭호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마이클 잭슨의 진짜 유산일지 모른다.
김 양희 음악박사
Director of Los Angeles Opera Association
클래식 음악 및 오페라 해설 강사
음악 교육자
오페라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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