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 속 깊은 데서부터 끌어올리는 한 맺힌 소리로 네 시간을 꼬박 혼자 극을 이끌어가는 판소리 완창을 들어봤어?”
공연장에서 받은 흥분이 조금이라도 식을까, 집까지 단숨에 부웅 달려와 남편에게 소리치듯 첫마디를 던지며 대문을 들어섰다.
지난 토요일, 칠순을 바라보는 친구 남편, 엘에이의 명창 김원일의 미산제 <수궁가> 완창 공연을 다녀왔다. 무려 네 시간 동안 소리꾼 한 사람이 무대를 지키며 용왕과 자라 (별주부), 토끼는 물론 물고기와 온갖 짐승들을 불러냈다. 뱃속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듯한, 흙냄새 밴 걸쭉한 소리 하나로 수궁의 어전회의가 펼쳐지고 산과 바다가 열렸다.
자라의 언변에 홀려 수궁에 붙들려 온 토끼가 기지를 발휘해 가까스로 빠져나오면 이야기가 끝나는 줄 알았다. 웬걸, 육지로 돌아온 뒤에도 숲의 제왕 호랑이와 하늘을 호령하는 독수리까지 토끼의 명줄을 노리는 또 다른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살아남으려는 토끼의 아슬아슬한 여정을 북소리 장단에 맞추어 올치! 잘한다! 얼쑤 조오타! 아고 아고 어쩌나! 그러치! 침 튀듯 추임새를 질러가며 느린 진양조 장단에서 점점 고조되는 이야기에 따라 빠른 자진모리 장단에 맞추어 어깨를 들썩이며 따라가다 보니 네 시간이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다. 가슴을 조였다가 풀어놓고, 웃다가 다시 긴장시키는 소리꾼의 목소리에 나는 어느새 객석을 떠나 토끼와 함께 수궁과 산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서양의 오페라는 여러 성악가와 수십 명의 연주자가 이끌어가는 거대한 음악극인데, 어떻게 판소리는 소리꾼 한 사람과 북 하나로 이토록 거대한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리고 또 하나의 엉뚱한 상상이 뒤따랐다.
이 <수궁가>의 토끼를 서양 오페라 무대에 풀어놓는다면 과연 누구를 만나게 될까?
토끼와 여우가 만나다
“토끼의 간을 내어 놓아라.”
이 황당한 명령 하나로 <수궁가>의 비극과 희극이 동시에 시작된다. 병든 용왕을 살리기 위해 아무 죄 없는 토끼 한 마리가 죽어야 한다. 자라의 유려한 언변에 속아 용궁까지 끌려온 토끼는 그러나 울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입을 연다. 그리고 말로써 자신보다 훨씬 강한 권력을 이긴다.
멀리 체코의 숲에도 인간에게 붙잡힌 동물 한 마리가 있다. 체코 작곡가 레오시 야나체크의 오페라 <The Cunning Little Vixen (영리한 암여우)>의 여우다. 산지기에게 붙잡혀 인간의 세계에 갇힌 여우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를 박차고 자신의 본향인 숲으로 탈출한다.

한 마리는 말로 용궁을 빠져나오고, 다른 한 마리는 울타리를 넘어 숲으로 돌아간다.
토끼에게는 언변이 자유를 얻는 무기였고, 여우에게는 자연에로의 귀환이 자유였다.
한 사람의 목소리와 백 명의 무대
오페라 극장에 들어가면 먼저 규모에 압도된다. 오케스트라 핏트에는 수십 명의 연주자가 앉아 있고 무대에는 주연 성악가와 합창단이 등장한다. 지휘자와 연출가, 무대장치와 의상, 조명까지 합쳐져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판소리 무대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소리꾼 한 사람, 고수 한 사람, 그리고 북 하나!
그런데 소리가 시작되는 순간 그 빈 무대가 용궁이 된다. 소리꾼은 용왕이었다가 별주부가 되고, 어느새 토끼가 된다. 대신들이 웅성거리고 물고기들이 몰려들며 산천의 짐승들이 눈앞에 나타난다.
오페라는 여러 사람에게 인물을 분배하지만 판소리는 한 사람 안에 세계를 응축한다.
소리꾼은 노래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소리’로 인물의 감정을 노래하고, ‘아니리’로 이야기를 전진시키며, ‘발림’으로 무대설치 공간과 행동을 눈앞에 만들어낸다. 고수의 북 또한 단순한 반주가 아니다. 장단을 잡아주고 추임새로 극에 개입하며 소리꾼과 관객 사이의 호흡까지 움직인다.
관객 역시 조용히 앉아 감상만 하지 않는다. “얼씨구!”, “좋다!”를 외치며 공연 속으로 들어간다. 마치 야구장에서 목청껏 응원하고 난 뒤처럼 묵은 스트레스까지 훌훌 털어버리는 통쾌함이 있다.
말이 음악이 되는 순간
그렇다면 미산제<수궁가>와 야나체크의 오페라가 음악적으로 만나는 지점은 어디일까.
나는 그것을 ‘말’이라고 생각한다.
판소리는 한국말과 떼어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소리꾼은 말을 늘이고 꺾고, 밀고 당기며 장단 위에 붙인다. 같은 대목도 어느 말을 어느 박에 놓고 어디에서 밀어내느냐에 따라 인물의 성격과 상황이 달라진다. 선율이 말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말에서 선율이 태어난다.
야나체크 역시 놀랍도록 비슷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체코 민요 뿐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로 말할 때 생기는 소리의 높낮이와 리듬, 속도와 억양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가 발전시킨 독특한 ‘말의 선율(speech melody)’은 이미 만들어진 멜로디에 언어를 얹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말 자체에서 음악을 발견하려는 시도였다.
그래서 <영리한 암여우>에서는 전통적인 이탈리아 오페라의 긴 아리아와 달리 짧고 살아 있는 음악적 몸짓들이 끊임없이 움직인다.
바로 두 나라의 말의 사용법, 여기에서 판소리와 야나체크가 뜻밖의 악수를 한다.
노래가 말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말 속에 이미 숨어 있던 음악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토끼는 왜 그렇게 말을 많이 하는가
<수궁가>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칼도 권력도 아니다.
‘말’이다.
용왕에게는 권력이 있고 별주부에게는 충성과 언변이 있다. 그러나 토끼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용궁까지 끌려온 순간 그는 가장 무력한 존재다.
그런데 토끼가 입을 여는 순간 권력관계가 뒤집어진다.
“간을 육지에 두고 왔습니다!”
터무니없는 말 한마디에 절대 권력자가 넘어간다. 쯧쯧, 시한부 목숨의 용왕님은 그 말을 어찌 믿었을까나?
여기서 토끼의 말은 단순한 대사가 아니다. 약자가 살아남기 위한 지혜이며 동시에 권력을 희화화하는 풍자의 무기다. 그래서 <수궁가>의 재미는 줄거리 자체보다 명줄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토끼가 위기 때마다 ‘어떻게 말하느냐’에 있다.
소리꾼이 장단을 밀고 당기고, 능청스럽게 아니리를 풀어가며, 순간순간 청중의 반응을 끌어들이면 토끼는 옛 우화 속 동물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권력자를 가지고 노는 살아 있는 인물이 된다. 그때에 관객은 단순한 구경꾼으로 남아있게 되지 않고, 웃고 추임새를 넣고, 박수를 치며 토끼의 꾀에 함께 올라탄다. 권력을 향한 풍자가 무대와 객석 사이에서 공동으로 완성된다.
여우는 왜 숲으로 돌아가는가
야나체크의 여우도 인간보다 약하다.
산지기는 여우를 붙잡아 인간의 세계로 데려온다. 인간은 야생을 소유하고 길들이려 하지만 여우는 그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다. 그는 울타리를 넘어 숲으로 돌아가 사랑하고 자신의 분신인 새끼를 낳으며 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 여우는 결국 밀렵꾼의 총에 맞아 죽는다.
여기에서 <수궁가>와 <영리한 암여우>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갈라진다.
토끼의 이야기는 생존의 승리로 끝난다.
여우의 이야기는 죽음까지 품는 생명의 번성으로 나아간다.
토끼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묻는다면, 여우는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수궁가>가 권력의 허위를 웃음으로 폭로한다면, 야나체크는 인간이 자연을 소유할 수 있다는 착각까지 조용히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두 작품에서 동물은 인간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런데, 토끼와 여우가 정말 만났다!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두 작품 사이에서 기막힌 장면 하나를 발견했다.
내가 상상 속에서 만나게 했던 <수궁가>의 토끼와 야나체크의 여우가 오페라 속에서 정말 만나는 것이 아닌가!
숲으로 돌아간 암여우가 사랑하는 수여우를 만났을 때, 수여우는 사랑의 보답에 사냥한 먹이를 최상의 선물로 그녀 앞에 내놓는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토끼’다!
아이쿠나!
용왕에게 간을 빼앗길 뻔하고도 살아남은 토끼! 겨우 수궁을 빠져나와 육지에 올라와서는 호랑이를 피하고 독수리까지 피해가며 그토록 악착같이 명줄을 붙들었던 토끼가, 체코의 숲까지 건너오더니 마침내 여우의 먹이가 되고 말았단 말인가!
권력도 이겼고, 호랑이도 피했고, 독수리도 피했건만 이국의 먹이사슬은 못 피했나 보다.
생각해보면 이보다 절묘한 두 작품의 만남도 없다.
<수궁가>에서 토끼는 지혜와 언변으로 죽음을 끊임없이 피해간다. 그러나 <영리한 암여우>가 바라보는 자연에서는 삶과 죽음이 승리와 패배로만 나뉘지 않는다. 토끼도 살고 여우도 살지만, 누군가의 삶은 또 다른 생명의 먹이가 되고 여우 자신도 결국 죽어 숲의 순환 속으로 돌아간다.
그러니 두 작품은 서로 다른 대륙에서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만난다.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다 건너 만난 두 음악극
오페라는 여러 사람에게 세계를 나누어 맡기고 판소리는 한 사람 안에 세계를 응축한다. 하나는 거대한 오케스트라로 숲을 만들고, 하나는 북 하나와 사람의 목소리로 수궁과 산천을 만든다.
그토록 다른 두 음악극이 동물의 눈을 빌려 인간을 바라보고, 마침내 한 마리 토끼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만나버렸다.
얼쑤! 잘한다, 여우!
우야몬 조으노, 토끼야~~~~
어느새 창과 오페라의 경계마저 슬며시 허물어진다.
창과 오페라 사이에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넓은 바다가 있었지만,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예술의 눈 사이에는 애초부터 바다가 없었던 모양이다.
김 양희 음악박사
Director of Los Angeles Opera Association
클래식 음악 및 오페라 해설 강사
음악 교육자
오페라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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