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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희 .jpg

 

 

 

 

와아~~ 비 온다!”

로스앤젤레스에 기대하지 않았던 늦여름 비가 시원하게 내렸다.

비 내리는 길을 걷거나 빗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무조건 차를 탔다. 목적지가 먼저 있었던 것도 아니다. 빗소리를 들으며 깨끗해지는 거리를 천천히 달리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러다가 문득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LA 다운타운의 한 장소가 떠올랐다.

오래된 극장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 놓고 그 안을 최신 전자기기로 채웠다는 Apple Tower Theatre!

 다운타운 타워.jpg

 

 

현대식 건축이나 가구보다 오래된 앤틱에 훨씬 마음이 가는 나로서는, 거의 백 년 된 극장 안에 최신형 컴퓨터와 전화기가 들어앉아 있다는 그 묘한 조합을 언제 한번 꼭 보고 싶었다.

아하, 오늘은 파킹 미터 시간에 쫓기지 않고 천천히 볼 수 있겠구나!’

마침 노동절 공휴일이라 주차 단속원들도 쉬는 날이었다. 이런 작은 횡재까지 생겼으니 방향을 LA 다운타운으로 잡았다.

Tower Theatre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물건보다 먼저 위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나, 이게 애플스토어야? 극장이야?”

높고 둥근 타원 돔 천장과 화려한 장식, 발코니와 조각들…. 오래된 극장의 모습은 여전히 당당하게 살아 있는데 그 아래 테이블에는 반질반질한 iPhone MacBook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서로 밀어내지도 않고 한 공간에 너무나 태연하게 함께 있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다운타운 타워 2.jpg

 

 

도대체 이 극장은 언제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일까?

Tower Theatre 1927년 문을 열었다. 극장 건축가 S. Charles Lee가 처음 설계한 극장이며, LA에서 유성영화를 위해 음향 설비를 갖춘 최초의 영화관이었다. 내부는 파리 오페라하우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고, 900석의 객석이 들어섰다고 한다. 훗날 문을 닫아 오랫동안 비어 있던 건물을 Apple이 복원하여 2021년 다시 사람들에게 문을 열었다.

그런데 1927년이라니!

그렇다면 이 극장이 생기기 전 LA 사람들은 어디에서 공연을 보았을까?

그 궁금증을 따라가다 보니 LA의 오래된 극장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세기의 작은 도시였던 로스앤젤레스에도 사람들이 모여 공연을 즐기는 공간이 하나 둘 생겨났고, 도시가 커지면서 극장도 함께 성장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 영화산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도시가 팽창하면서 Broadway 일대에는 영화를 보러 가는 것 자체가 하나의 특별한 외출이 될 만큼 화려한 극장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Merced Theatre, Million Dollar Theatre, Orpheum Theatre, Tower Theatre, Los Angeles Theatre….

영화를 보기 위한 건물이라기보다 작은 궁전에 가까워 보이는 극장들이었다.

그런데 Orpheum이라는 이름에서 갑자기 내 기억 하나가 튀어나왔다.

, 나도 거기 여러 번 갔었지!’

예전에는 한국에서 온 가수들의 LA 공연이 Orpheum Theatre에서 열리곤 했다. 가수 이은미의 무대도 그곳에서 직접 보았다.

그런데 나는 가수의 노래를 들으러 가서도 자꾸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정교한 조각과 화려한 벽 장식, 조명과 천장….

무대에서는 가수가 노래하고 있는데 오래된 극장의 벽과 천장도나도 좀 봐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원래 앤틱을 좋아하는 내 눈에는 그 극장 자체가 또 하나의 공연이었다.

알고 보니 내가 그렇게 올려다보았던 Orpheum 1926년에 문을 연 극장이었다. 프랑스풍의 화려한 내부와 거대한 샹들리에를 갖춘 이곳은 보드빌 공연의 중요한 무대였고, 세월이 흐른 뒤에는 영화와 콘서트를 품으며 살아남았다.

내가 가수들의 공연을 보러 그곳에 들어갔을 때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앉아 있던 그 객석에도 한 세기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앉았다가 일어났을까.

하지만 도시의 중심은 언제까지나 한곳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영화산업이 성장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은 Hollywood로 향했고, 자동차와 교외 생활이 확산되면서 Downtown Broadway의 화려했던 극장가도 예전 같은 전성기를 누리지는 못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LA에서 공연예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무대는 다른 곳에서 다시 불을 밝혔다. 바로 다운타운의 Bunker Hill에서이다.

Dorothy Chandler Pavilion.

1964년 문을 연 이 공연장은 내게는 역사책 속 건물이 아니라 꽤 친근한 곳이다.

오페라단 오디션을 보러 들어간 적도 있고, 오페라 강의를 위해 공간을 빌리기도 했으며, 백스테이지를 돌아볼 기회도 있었다. 무대 위에서 객석을, 또 객석에서 무대를 바라본 기억 뿐 아니라 무대 뒤의 복도와 방들까지 내 음악생활의 여러 장면과 겹쳐 있는 곳이다.

그리고 나는 분수의 물소리가 시원하게 터져 오르는 그곳 앞뜰을 좋아한다

그 앞에 서면 동쪽으로 시야가 확 열리며 LA 시청을 향해 도시가 펼쳐진다. 공연장이라는 건물이 혼자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함께 하나의 커다란 무대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바로 가까이에 있는 Ahmanson Theatre에서는오페라의 유령같은 뮤지컬을 보았다.

그리고 세월이 조금 더 흐른 2003, Walt Disney Concert Hall이 문을 열었다.

학생이던 시절에는 저녁을 먹고 나면 집에서 Dorothy Chandler Disney Hall로 향하곤 했다. 공연을 보러 얼마나 자주 다녔는지, 지금 생각하면 학교 출석보다 공연장에 출근 도장을 더 열심히 찍은 것은 아니었던가 싶다.

특히 Disney Hall 개관 연주에서 처음 느꼈던 소리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일반적인 공연장에서는 무대 저쪽에서 만들어진 소리가 객석까지전달되어 온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달랐다. 객석이 무대를 둘러싸듯 배치되어 있어서인지 소리가 멀리서 건너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연주자에게서 곧바로 나에게 닿는 듯했다.

실제로 Walt Disney Concert Hall은 무대를 중심으로 객석이 둘러앉는 이른바 ‘vineyard’ 형태로 설계되었으며, 건축가 Frank Gehry와 음향 전문가 Yasuhisa Toyota가 건축과 음향을 함께 발전시켜 만든 공간이다.

음악가에게 공연장은 단순히 음악을 담는 커다란 상자가 아니다.

같은 오케스트라의 같은 음악도 어느 공간에서 듣느냐에 따라 숨결과 울림이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Disney Hall에서는 건물도 함께 연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렇게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나는 한 세기가 넘는 LA의 공연장들을 마음속으로 한 바퀴 돌고 있었다.

오래된 Broadway의 부귀영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궁전 같은 극장들에서, 새로운 시대의 공연예술을 품은 Dorothy Chandler Pavilion Ahmanson Theatre, 그리고 또 한 번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 Walt Disney Concert Hall….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보니 나는 비 오는 날 찾아온 Tower Theatre 안에 서 있었다.

내 앞에는 최신형 iPhone MacBook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조금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 이 극장은 정말 극장을 그만두고 Apple Store가 된 것일까?’

1927 Tower Theatre LA에서 유성영화를 위한 설비를 갖춘 최초의 영화관이었다. 당시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상과 소리의 기술을 만나기 위해 극장 문을 열고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거의 백 년이 지난 오늘.

사람들은 똑같은 문을 열고 들어와 전화기로 영화를 찍고, 음악을 만들고, 사진을 편집하고, 세상과 연결되는 새로운 기술을 만지고 있었다.

웬걸!

극장이 사라진 줄 알았더니 이 건물은 아직도 제 할 일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사람들에게 그 시대의 새로운 것을 보여 주는 일 말이다!

100년전에 남겨진 객석 의자에 앉아 오래된 극장의 화려한 천장 아래에서 최신 전자기기를 만지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한때 그 아래에서는 영화가 상영되었고, 배우와 음악가들의 소리가 울렸으며, 이제는 사람들이 저마다 손바닥만 한 기계 속에 자신의 영화와 음악을 담아 들고 나간다.

보여주는 것은 달라졌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밖으로 나오니 다시 LA의 거리가 눈 앞에 펼쳐졌다.

비 오는 날 그저 오래된 극장 하나를 구경하러 왔을 뿐인데, 그 안에서 내가 오랫동안 드나들었던 공연장들과 젊은 날의 음악생활, 그리고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 도시를 채워 온 수많은 무대까지 만나고 나왔다.

오래된 것에 마음이 끌려 찾아간 극장 안에서 오히려새로운 것의 역사를 보고 나온 셈이다.

그래서인지 차로 돌아가는 길에는 처음 들었던 빗소리가 조금 다르게 들렸다.

 

음악박사 김 양희

Director of Los Angeles Opera Association

클래식 음악 및 오페라 해설 강사

음악 교육자

오페라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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