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국민학교 시절, 여름방학 숙제에는 으레 곤충채집이 끼어 있었다. 잠자리와 매미와 나비를 잡아 표본을 만들어 제출하는 숙제였다. 방학이 끝나갈 무렵이면 언니와 친구들을 대동하고 잠자리채 하나씩 들고 서울을 벗어나 먼 친척이나 아는 분의 집으로 원정을 떠나곤 했다. 잡아온 곤충들을 핀에 꽂아 표본을 완성하는 것이 여름방학의 연례행사였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지금, 나는 가을만 되면 다시 잠자리채를 들고 나서는 상상을 한다. 이번에는 곤충이 아니라 태양을 잡으러 태평양 바닷가로 향하는 것이다.
이름하여 ‘태양채집’!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쑤우욱 빠져들기 직전, 잠자리채를 길게 뻗어 망의 입을 활짝 벌리고 그 아래로 쑤우욱 들이밀어 본다. 어린 시절 잠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숨죽이며 채를 휘두르던 것처럼, 이번에는 저 붉고 커다란 태양을 통째로 받아내고 싶은 것이다.
LA에서 수십 년을 살다 보니 이곳에도 사계절이 뚜렷하게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가을이다. 왜냐고?
가을의 석양은 다른 계절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태양의 찬란한 빛깔은 은근하면서도 한층 짙어지고, 양털구름으로 뒤덮여진 채 높아진 하늘과 조금씩 싸늘해지는 공기마저 가슴 한구석을 포근히 감싸는 듯하다. 여름의 태양이 뜨거운 기세를 뽐낸다면, 가을의 태양은 한층 깊어진 색감으로 마음을 끌어당긴다.
문제는 태양이 수평선이나 지평선 아래로 풍덩 빠져드는 그 순간이 무지하게 짧다는 것이다. 잠깐 한눈을 팔았다가는 그 아름다운 장면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러니 해 질 시간이 가까워지면 자꾸만 시계에 눈이 꽂힌다. 오늘도 저 태양이 도망가기 전에 잡아야 한다는 조바심에 나도 모르게 자동차 열쇠를 집어 들게 된다.
지난주에는 한국에서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대학 동창인 성악가 부부였다. 두 사람 모두 이탈리아에서 유학한 음악가들이라 지중해의 햇살과 풍경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잘 아는 친구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지중해 못지않은 태평양의 가을 석양을 자랑하고 싶었다. 이탈리아에서 보냈던 젊은 날의 향수도 달래 주면서, 캘리포니아의 가을도 만만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 태양채집 원정대에는 이탈리아 유학파 성악가 부부까지 합류했다. 제법 국제적인 채집단이 꾸려진 셈이다.
우리의 첫 번째 채집 장소는 로스앤젤레스의 명소, 그리피스 천문대(Griffith Observatory)였다.

그리피스 천문대로 간 ‘태양 채집 원정대’
별을 관찰하는 천문대에 별이 뜨기도 전에 올라간 이유는 단 하나! LA 도심 위로 지는 가을 태양을 놓치지 않고 잡아내기 위해서였다.
천문대에 올라서자 LA 다운타운의 고층 빌딩들이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낮 동안 수많은 자동차가 분주히 오가던 도로와 끝없이 이어지는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자 도시 전체가 서서히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금빛 햇살이 건물의 하얀 벽면을 스치고, 멀리 펼쳐진 산등성이가 짙은 그림자로 변해갔다. 하늘은 노란색에서 주황색으로, 다시 분홍빛과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태양이 퇴장하자 기다렸다는 듯 도시의 불빛들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했다.
자연의 조명감독이 퇴근하자 인간의 조명감독이 출근한 것이다.
그날 나는 태양 하나가 퇴장하는 동안 거대한 도시 전체가 무대의 배경을 바꾸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동안 LA 곳곳에서 만났던 석양들이 떠올랐다. 다운타운에서부터 서쪽 태평양 바닷가까지, 같은 태양이 저마다 다른 풍경 속에서 하루를 마감하던 모습들 말이다.
먼저 다운타운 가까이에 자리한 에코팍 호수(Echo Park Lake)가 생각났다.
호수 남쪽을 바라보면 다운타운의 고층 건물들이 야자수 너머로 솟아 있고, 그 아래로 잔잔한 물결이 펼쳐진다. 저녁 빛이 내려앉으면 하늘과 건물들이 호수 위에 또 하나의 풍경을 그려낸다.
그런데 오리 가족이 줄줄이 물살을 가르며 지나가거나 바람이 한 번 불면, 반듯하던 빌딩들이 순식간에 구불구불해진다. 아무리 위엄 있는 마천루라도 물 위에서는 오리 몇 마리에 체면을 구기는 모양이다.
그리피스 천문대에서는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보았지만, 에코팍에서는 그 도시가 물 위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제 시선을 바다를 향해 서쪽으로 돌려본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너무 아름다워 나의 눈물을 쏙 빼놓았던 베네치아! 그 베네치아의 이름을 딴 동네가 LA에도 있다. 베니스 비치 근처에 숨어 있는 작은 운하 마을, 베니스 운하(Venice Canals)다.
작은 다리와 물길을 따라 정성껏 꾸며진 집들,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정원, 물가에 매어 놓은 보트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석양도 요란하게 등장하지 않는다. 해 질 무렵의 부드러운 빛이 창문과 물 위에 내려앉아 동네 전체를 따뜻하게 물들인다.
그리피스 천문대의 석양이 수많은 관객 앞에서 펼쳐지는 대규모 공연이라면, 베니스 운하의 저녁은 작은 살롱에서 열리는 실내악 연주회 같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작은 표정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산타모니카 피어(Santa Monica Pier)에서는 태평양의 수평선 위로 저녁 하늘이 펼쳐지고, 해변에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악, 파도 소리가 뒤섞인다.
피어 안쪽으로 쭈우욱 걸어 들어가다 보면 왼쪽으로 커다란 관람차 퍼시픽 휠(Pacific Wheel)이 나타난다. 태양광 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관람차다.
관람차에 올라타 점점 높이 올라가면 발아래 펼쳐지는 새파아란 바다에 아찔해진다. 손잡이를 꽉 움켜쥐고 숨마저 멎을 듯 긴장하다가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러다 시선을 저 멀리 수평선으로 돌리면 바닷속으로 풍덩 빠지기 일보 직전인 태양이 눈에 들어온다. 손을 길게 뻗으면 두 손으로 퍼 담을 수 있을 것만큼 가까워 보인다. 무서워 움켜쥐었던 손을 이번에는 태양을 잡으려고 뻗고 싶어진다. 어린 시절 잠자리채라도 있었다면 당장 내밀었을 판이다.
해가 져도 산타모니카 피어의 흥겨움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태양은 하루 일과를 끝냈는데 사람들은 이제부터 놀 준비가 된 듯하다.
“석양은 밤의 축제를 알리는 서곡”
이곳에서는 석양이 끝이 아니라 밤의 축제를 알리는 서곡이다.
태평양 해안을 따라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말리부의 엘 마타도르 비치(El Matador State Beach)가 나타난다.
이곳에는 고층 빌딩도, 관람차도, 아기자기한 운하도 없다. 대신 오랜 세월 파도가 깎아놓은 거대한 바위들이 해변에 우뚝 서 있다. 해가 기울면 바위들은 검은 실루엣으로 변하고, 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파도에 부서져 반짝인다.
엘 마타도르는 스페인어로 ‘투우사’를 뜻한다. 이름부터 강렬하다.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오페라에서 가장 화려하게 등장하는 투우사 에스카미요를 사랑하게 된 카르멘은 집착적인 사랑에 사로잡힌 돈 호세의 칼에 쓰러진다. 그 뜨거운 열정과 비극을 닮은 듯, 엘 마타도르의 태양도 마지막 순간까지 붉게 이글거린다.
그러나 이 해변에는 붉은 천을 흔드는 투우사가 없다. 대신 거대한 바위와 거친 파도가 태양의 마지막 붉은빛을 붙잡으려는 듯 한바탕 격정적인 춤을 춘다.
도시의 건물도,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멀어지고 이곳에는 바위와 파도, 그리고 붉은 태양만 남는다. 자연이 만들어 놓은 무대치고는 참으로 대단한 연출이다.
그런데 LA의 선셋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기에는 아쉬운 곳이 하나 더 있다.
말리부에서 여러 비치를 지나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팔로스 버디스 반도(Palos Verdes Peninsula)가 있다. 구불구불한 해안도로와 절벽이 이어지는 이곳에는 조금 특별한 스타벅스가 자리 잡고 있다.

골든 코브 쇼핑센터(Golden Cove Shopping Center)의 스타벅스다.
스타벅스야 동네마다 있으니 특별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런데 이곳에서는 커피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바로 시원하게 펼쳐진 태평양이다.
커피를 받아 야외 테라스로 나가면 탁 트인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멀리 카탈리나 섬(Catalina Island)도 바라볼 수 있다. 저녁 바람이 차가워질 때면 테라스의 화덕 곁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 운치도 있다.
사람들은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눈다. 간간이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그러다가도 태양이 바닷속으로 풍덩 빠져들 시간이 가까워지면 와~~ 하는 감탄과 함께 하나 둘 시선을 수평선으로 돌린다.
커피 가격에 태평양 전망까지 포함되어 있다니, 이 정도면 제법 후한 서비스가 아닌가!
그리피스 천문대에서는 도시 전체가 황혼에 잠기는 장관을, 에코팍에서는 호수에 비친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을 만났다. 베니스 운하의 아기자기한 물길과 산타모니카 피어의 활기찬 축제를 지나, 엘 마타도르에서는 바위와 파도가 빚어내는 자연의 웅장한 무대가 펼쳐졌다.
그렇게 저마다 다른 석양을 찾아다니다가 골든 코브에 이르면 마음도 한결 느긋해진다. 더 이상 멋진 풍경을 찾아 부지런히 발품을 팔 필요가 없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편안히 앉아 있으면 태평양의 저녁이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온다.
같은 태양인데 어디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빛깔과 표정은 참으로 다르다. 어떤 곳에서는 도시를 화려하게 물들이고, 어떤 곳에서는 물결 위에 부서지며, 또 어떤 곳에서는 커피 한 잔의 여유 속으로 조용히 스며든다.
태양은 하나인데, 그 빛을 받아들이는 풍경은 저마다 다른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똑같이 주어진 하루를 살아가지만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전쟁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즐거운 축제였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해가 뜨는 모습을 새로운 시작과 희망의 상징으로 생각한다. 새해 첫날이면 일출을 보겠다고 동쪽 바닷가로 몰려가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해가 지는 모습을 보려고 사람들이 모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끝을 보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끝나가는 순간의 아름다움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일까?
성악가인 나는 음악의 마지막 음이 끝난 뒤에도 잠시 남아 있는 울림을 좋아한다. 소리는 이미 사라졌지만 그 여운이 공연장 안에 머물며 음악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석양도 그렇다.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고 하늘의 공연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가 진 뒤 구름과 하늘이 더욱 짙은 분홍빛과 보랏빛으로 물드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리피스 천문대에서 사람들이 해가 진 뒤에도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일까. 태양은 사라졌지만 그 빛이 남긴 여운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린 시절 잠자리채에 잡힌 잠자리는 핀에 꽂혀 방학 숙제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잡으려는 태양은 태평양 바닷가 길을 따라 달리며 아무리 긴 잠자리채를 내밀어도 붙잡을 수가 없다.
매일 저녁 어김없이 풍덩 빠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괜찮다.
그날 잡지 못한 태양은 다음 날 또다시 떠오르고, 저녁이면 전혀 다른 빛깔로 나를 기다릴 테니까.
그러니 나의 가을 태양채집 숙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잠자리채 하나로는 도저히 다 담을 수 없는 LA의 석양이 아직도 너무 많으니 말이다!
음악박사 김 양희
Director of Los Angeles Opera Association
클래식 음악 및 오페라 해설 강사
음악 교육자
오페라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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