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내가 밥만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남편도 내 앞에서 아무 말 없이 밥만 먹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얼굴이 화끈거렸다. 옆 자리부터 둘러봤다. 그곳에 앉은 젊은 여성들이 우리 이야기를 할 것만 같았다.
“저 아줌마랑 아저씨는 별로 사랑하지 않나 봐. 서로 말도 안 하고 밥만 먹어. 우리는 결혼해도 저러지 말자.”
꼭 이렇게 말할 것만 같았다. 결혼하기 전, 내 모습이다. 그 시절, 친구들과 식당에 가면 가끔 아이와 같이 와서는 말없이 식사만 하는 부부들을 봤다. 그때마다 생각했다. 둘은 별로 사랑하지 않나 봐. 쳐다보지도 않고 대화도 없어. 결혼한 지 오래되면 정으로 산다더니 정말 그런가 봐. 나는 결혼해도 저러지 않을 거야.
가끔은 생각이 머릿속에만 머무르지 않고 말이 되어 밖으로 나오기도 했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판단하고 평가했다. 그런데 15년 뒤 나도 똑같이 그런 아줌마가 되어 밥만 먹고 있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말없이 밥만 먹고 있어도 그 시간이 달콤한 휴식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을. 아줌마에게 외식은 식사 준비와 설거지로부터 해방되는 시간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남편과 굳이 대화 좀 하지 않으면 어떤가. 오히려 둘은 침묵도 편안할 만큼 가까운 사이일 수 있다는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남을 판단했던 때, 또 있다. 지인이 대화 도중 평일 저녁엔 집에서 일회용 접시를 쓴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당시 맞벌이를 하고 있었는데 남편도 바빠서 집안일을 많이 도와주지 못했다. 사정 뻔히 알면서 여기다 대고 당시 결혼도 하지 않았던 나는, 맞벌이의 치열함을 눈곱만큼도 몰랐던 나는, 훈계를 늘어놨다.
“아이고, 일회용에서 환경 호르몬 나와요. 몸에 나빠요. 쓰지 마세요.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먹는 저녁 식탁이 정말 중요하잖아요. 아이들이나 남편도 예쁜 그릇에 밥 먹고 싶을 거에요.”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고, 나에게도 일회용 접시가 필요한 날들이 생겼다. 저녁을 먹고 일회용 접시를 치우다 불현듯 예전에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때도 얼굴이 화끈거려 혼났다. 너가 엄마 한번 돼 보라고, 맞벌이 한번 해보라며 화냈을 법도 한데 별말 없이 지나가 준 그녀가 뒤늦게 참 고마웠다.
주울 수만 있다면 주워 담고 싶은 말도 있다. 자녀가 한 명인 회사 선배들에게 해맑은 표정으로 “선배, 애들은 둘이 커야 해요. 외동 별로 안 좋대요. 한 명 더 낳으세요”라고 눈도 깜짝 않고 말하기도 했었다. 선배들은 하나같이 나는 맞벌이 하잖아, 우린 미국에 가족이 우리뿐이야,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라고 답했다.
그때는 그 말의 깊이와 무게를 알지 못했다. 미국에서 부부가 맞벌이를 하며, 다른 가족 도움 없이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몰랐다. 그러니 그런 선배들에게 “그래도 애들은 다 알아서 큰대요. 외동보다는 둘이 좋잖아요”라며 아는 척을 했을 것이다.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If I knew)’이라는 오래된 시에서 저자 킴벌리 커버거(Kimberly Kirberger)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내 가슴이 말하는 것에 더 자주 귀 기울였으리라’고 했다. ‘더 즐겁게 살고, 덜 고민했으리라’고 적었다.
‘나라면?’이라고 이제와 생각해 본다. 나라면, 함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으리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타인의 인생에 함부로 조언하지 않았으리라. 대신 더 많이 듣고, 덜 아는 척했을 것이다.
입은 하나이고, 귀는 두 개인 이유가 두 배 더 많이 들으라는 뜻이라는 말처럼 내 가슴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에도 더 많이 귀를 기울이고 싶다. 내가 아는 것과 본 것이 전부라고 믿으며 남을 평가하지 않고 싶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김동희
전 미주 한국일보, 뉴욕 중앙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현재 미국병원 암센터에서 커뮤니티 아웃리치 담당자로 일하며, 미국에서의 일상을 소재로 네이버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다. dhkimla@gmail.com
Comment 0
일자: 2025.03.09 / 조회수: 50 “미국 51개주로 편입”보기좋게 깨부슨 캐나다 아이스하키 한국 보다 적은 인구 캐나다, 동계 스포츠 강해 4개국 페이스오프 우승으로 캐나다 자존심 세워 캐나다는 2024년 센서스에 따르면 인구 4146만 여명의 국가다. 대한민국의 남한 인구보다 적다. 인구에 비해서 스포츠 강국이다. 민주주의도 완성돼 있는 선진국이다. 북반구의 추운 ... |
일자: 2025.02.17 / 조회수: 40 취미가 무엇이냐 물으면 주저 없이 답한다. “영어 그림책의 매력에 푹 빠졌어요.”라고. 시작은 4년전 전 세계를 강타한 팬데믹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온 세계가 잠시 멈췄을 당시, 집에 갖혀 외출을 최소화하던 그 시기, 우연히 ‘영어 그림책 100권 읽기&rs... |
일자: 2025.01.09 / 조회수: 55 새 해, 남편에게 운동화 선물을 받았다. 새 신을 신고 나서며 말했다. 남편이 사준 운동화를 신고 나오니 기분이 좋네. 목소리에서 신남이 묻어났는지 남편이 말했다. 올 한 해 슈퍼스타 같은 삶을 살 길 바래. 남편이 선물한 운동화 디자인의 이름이 ‘슈퍼스타’였다.... |
일자: 2024.12.21 / 조회수: 64 얼마전 지인이 페이스북에 흥미로운 기사를 공유했다. ‘당신의 자녀가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갖도록 돕는 15가지 질문(15 Questions To Ask Your Kids To Help Them Have Good Mindsets)’이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처음엔 한 아이의 엄마로써 질문을 읽었다. 아이에게 ... |
일자: 2024.11.17 / 조회수: 63 “아이들이 엄마를 언제 생각하는지 알아요? 길가다 예쁜 사람 봤다고 엄마를 떠올리진 않아요. 엄마를 ‘맛’으로 기억해요. 김치찌개 먹으면서, 된장찌개 만들면서 엄마를 떠올리죠. ‘엄마 맛이 아니야. 엄마꺼 먹고 싶어’하면서 전화가 와요.&rdquo... |
일자: 2024.10.16 / 조회수: 71 좋아했던 사람이 있다. 인생의 한 시기, 그녀들과 함께여서 참 따뜻했다. 처음 그녀를 만난 것은 어느 식사 자리였다. 밝고 쾌활한 그녀는 그날 모인 많은 이들에게 큰 웃음을 선사했다. 얼마나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는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으면 모든 상황이 눈 앞에 생생하게 ... |
일자: 2024.09.22 / 조회수: 75 얼마전 회사 동료가 결혼을 했다. 샌디에고 바닷가에서 결혼식을 올린 그녀가 휴가에서 돌아오자 동료들은 그녀의 결혼식 이야기 듣기로 바빴다. 결혼식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과 피로연의 즐거운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다가 웨딩 케이크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 |
일자: 2024.08.09 / 조회수: 368 딸 아이의 이름은 그레이스(Grace)다. 하지만 종종 그레이스 에스(Grace S.)로도 불린다. 미국에서는 퍼스트 네임이 같을 경우 라스트 네임의 첫 대문자를 붙인다는 것을 다른 그레이스들을 만나면서 알게 됐다. 한글 이름 중 동명이인을 김영희 A와 B로 구분하는 것의 미국 방식... |
일자: 2024.07.14 / 조회수: 65 유난히도 바빴던 상반기를 끝내고, 7월 첫 주 휴가다. 세상의 모든 분주한 것들과 이별하고 나만의 시간, 맛있는 커피 한 잔이 간절하다. 오랜만에 여유 있는 아침이니 핸드 드립(Hand-Drip)으로 마셔야겠다. 핸드 드립은 커피를 만드는 방법 중 한 가지로 푸어 오버(Pour Over)라... |
일자: 2024.06.29 / 조회수: 50 불현듯 내가 밥만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남편도 내 앞에서 아무 말 없이 밥만 먹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얼굴이 화끈거렸다. 옆 자리부터 둘러봤다. 그곳에 앉은 젊은 여성들이 우리 이야기를 할 것만 같았다. “저 아줌마랑 아저씨는 별로 사랑하지 않나 봐... |
일자: 2024.04.14 / 조회수: 207 어느 화창한 일요일, 동네를 걷다 보니 아이들이 담요를 깔고 장난감을 팔고 있었다. 아이들은 나무에 ‘가라지 세일(Garage Sale)’이라고 써서 크게 붙여놨다. 풍선으로 예쁘게 장식도 했다. 동네 사람들은 지나가다 발길을 멈췄다. 누구는 “너희들 정말 멋진 ... |
일자: 2024.03.22 / 조회수: 67 커뮤니티 아웃리치 담당자로 일하다 보면 다양한 상황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현재는 암센터에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한인들이 암 정기검진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다. 암은 조기에 발견하면 치료가 쉽고, 생존율도 높일 수 있는 대표적인 질병... |
일자: 2024.02.16 / 조회수: 73 딸아이가 친구를 만났을 때다. 아이 친구 엄마와 같이 앉아 있는데 딸국질을 하는게 보였다. 혼잣말처럼 “뭐 맛있는 걸 혼자 먹었나, 딸국질을 하네”라고 하는 찰나 아이의 친구 엄마는 웃으며 영어로 “딸국질을 하는 걸 보니 키가 크려나 보다”고 했다. ... |
일자: 2023.12.14 / 조회수: 150 시더스-사이나이 암센터 COE팀과 이웃케어클리닉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양주동 간 전문의가 간암과 임상시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시더스-사이나이 병원 간암센터 양주동 디렉터 B형 간염, 간암 위험율 높여 음주·비만 ×, 건강식·운동 ○ 임상시험으로 최신 ... |
일자: 2023.11.17 / 조회수: 72 이 계절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닥터 리’, 10여 년 전 썼던 기사의 주인공이다.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유는 그와의 인터뷰가 정신없이 달리던 내 삶을 멈춰 세웠기 때문이다. 냉기가 느껴지던 작은 방에서 그와 처음 마주했다. 치과의사였던 그를 만난 곳... |
일자: 2023.10.23 / 조회수: 73 한 달에 한두 번은 걸려 오는 전화가 있다. 가슴에 멍울이 있는데 유방암 검사를 어디서 받을 수 있냐는 질문부터 유방암 진단을 받았는데 건강보험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연에 이르기까지 유방암 관련 문의들이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상대방의 나이를 알게 되... |
일자: 2023.09.19 / 조회수: 67 일 주일에 한 번, 팀미팅을 한다. 팀원들이 모두 모여서 한 주동안 있었던 일을 보고하고, 앞으로 계획된 행사들을 논의하는 시간이다. 이 때마다 가장 처음엔 하는 일이 체크 인(Check-in)이다.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데, 서로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공유한다. 이 때 가장 ... |
일자: 2023.08.17 / 조회수: 70 여기저기 얼마나 전화를 해댔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기다려야 했고, 연결이 되어도 이 사람이 하는 말, 저 사람이 하는 말이 달라서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언제인가 봤던 영화에서 산길을 잃은 주인공이 밤새 길을 헤메었지만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왔... |
일자: 2023.07.15 / 조회수: 104 어느새 5년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20대 후반에 미국에 왔다. 미국병원에서 일하게 됐다고 했을 때 내 영어 실력을 아는 지인들은 “보스랑은 어떻게 의사소통 할거야?”라고 물었다. 나 역시도 영어가 걱정이었다. 지금이야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날마다 &lsquo... |
일자: 2023.06.09 / 조회수: 89 사진 출처: Designmatters at ArtCenter College of Design ‘자카란다’ 피는 계절이 되면 건강검진을 생각한다. 아주 사소한 대화가 자카란다라는 ‘꽃’과 건강검진이라는 ‘행동’을 연결시켰다. 5년전 이맘때다. 회사 동료들과 길을 걷고 있었... |